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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마 산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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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마 산장 사건은 1972년 2월, 일본의 극좌파 단체 연합적군이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아사마 산장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인 사건이다. 1970년대 초반 잇따른 은행 강도와 총기 탈취 사건을 일으킨 연합적군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은신처를 마련하고 내부 숙청을 거치며 세력을 키웠다. 1972년 2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아사마 산장을 점거,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삼고 10일간의 대치를 시작했다. 경찰은 인질 구출과 범인 생포를 위해 다양한 작전을 펼쳤으나, 3명의 경찰관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2월 28일,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범인 5명은 체포되었고 인질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이 사건은 연합적군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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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마 산장 사건
위치 정보
장소나가노현 기타사쿠군 가루이자와정, 일본
좌표36°17′20.93″N 138°37′19.38″E
사건 개요
명칭아사마 산장 사건
날짜1972년 2월 19일 - 2월 28일
시간일본 표준시
종류인질 억류, 총격 사건
원인(제공된 문서에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없음)
사용 무기엽총(산탄총 & 라이플)
권총
철 파이프 폭탄
공격 인원5명
결과인질 구출
범인 전원 체포
참가 세력
1측일본 나가노현 현 경찰청
2측연합 적군
경찰 병력1,500명, 1대 장갑 크레인, 여러 대의 장갑차
연합 적군 병력5명
인명 피해
사망자경찰관 2명
민간인 1명
부상자경찰관 26명
보도 관계자 1명
기타 피해(제공된 문서에 실종자 정보 없음)
범인 정보
범인연합 적군 (사카구치 히로시, 반도 구니오, 요시노 마사쿠니, 가토 노리타카, 가토의 동생)
혐의(제공된 문서에 혐의 정보 없음)
동기(제공된 문서에 동기 정보 없음)
관여(제공된 문서에 관여 정보 없음)
사건 대응
방어(제공된 문서에 방어 정보 없음)
대처인질을 구출하고 범인 전원 체포
기타
사죄(제공된 문서에 사과 정보 없음)
배상(제공된 문서에 배상 정보 없음)

2. 사건의 발단

1960년대 일본에서는 좌익 학생운동이 활발했으나, 점차 과격화되고 파벌 간 경쟁이 심화되었다. 1970년대 초, 연합적군의 전신이 되는 일본공산당(혁명좌파) 가나가와현위원회(게이힌 안보공투)와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는 은행 강도, 총포점 습격 등 무장 투쟁을 벌이며 자금과 무기를 확보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고,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들 조직원들은 군마현 등지의 산악 지대로 숨어들어 '산악 베이스'를 구축하고 1971년 말 연합적군을 결성했다.[1]

그러나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외부와의 접촉이 끊기면서 조직은 고립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1년 말부터 최고 간부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의 주도로 '총괄'이라는 이름 아래 잔혹한 내부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이 폭행과 고문 끝에 사망하는 산악 베이스 사건이 발생했다.[5]

1972년 2월, 경찰이 산악 베이스의 흔적을 발견하고 수사망을 좁혀오자, 남은 연합적군 멤버들은 도주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고 간부 모리와 나가타를 포함한 다수의 멤버들이 체포되거나 이탈했다. 결국 사카구치 히로시, 반도 구니오 등 5명의 멤버만이 남아 나가노현 가루이자와 방면으로 도주했고, 1972년 2월 19일 아사마 산장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게 되었다.[6]

2. 1. 1971년

1971년은 연합적군의 전신이 되는 두 좌익 무장 단체, 일본공산당(혁명좌파) 가나가와현위원회(게이힌 안보공투)와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가 각각 총포상 습격이나 은행 강도 등 무장 투쟁을 벌이다 경찰의 대대적인 추적을 받게 된 해였다.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군마현 등지의 산악 지대로 거점을 옮겨 '산악 베이스'를 구축했으며, 1971년 연말에는 두 조직이 통합하여 연합적군을 공식적으로 결성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고립과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조직 내 긴장이 고조되었고, 연말부터 최고 간부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의 주도로 '총괄'이라 불리는 혹독한 내부 비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후 산악 베이스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2. 1. 1. 연합적군의 초기 활동

1960년대 일본 대학가에서는 좌익 학생운동이 활발했으나, 19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파벌화되고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 좌익 단체들이 경찰과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잇따르자, 일본 국가 공안위원회는 이들 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1971년과 1972년에 걸쳐 은신처를 급습하고 다수의 조직원을 체포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적군의 전신이 되는 두 개의 극좌파 조직이 활동을 시작했다. 나가타 히로코와 사카구치 히로시가 이끌던 일본공산당(혁명좌파) 가나가와현위원회(언론 통칭 '게이힌 안보공투')는 1971년 2월 17일, 도치기현 모오카의 총포상을 습격하여 엽총, 소총, 탄약 등 총기와 탄약을 탈취했다.[2] 이 사건으로 일부 조직원이 체포되면서 나가타와 사카구치 등 주요 인물들이 지명수배되었다.[2]

한편, 모리 쓰네오가 이끌고 반도 구니오 등이 속한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는 1971년 2월부터 7월까지 은행과 우체국 등을 대상으로 연속 강도 사건(경찰 명칭 '머니 작전', 또는 PBM 작전의 일부)을 벌여 활동 자금을 확보했다.[3] 당시 학원 분쟁이 종식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부 공안 담당 기자를 제외하고는 이들 조직의 존재나 활동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3]

경찰은 도시 지역에서 철저한 직무 질문과 아파트 거주자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치는 등 총력을 기울여 이들의 행방을 쫓았다. 특히 모오카 총포점 습격 사건이 발생한 1971년 2월은 '수사 강화 기간'으로 지정되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수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도시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두 조직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군마현 등지의 산악 지대로 숨어들었다. 게이힌 안보공투는 하루나산, 가쇼산, 묘기산 등에 거점을 마련했고, 적군파 역시 야마나시현을 거쳐 군마현으로 이동하여 합류했다. 이들은 산속에 은신처인 '산악 베이스'를 구축했다.

1971년 12월 초, 두 그룹은 총 29명의 인원으로 첫 합동 군사 훈련을 실시했으며, 같은 달 20일 하루나산 기지에서 지도부 회의를 열고 통합하여 연합적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결성 직후부터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외부 지원이 끊기면서 조직은 고립되고 약화되었다. 12월 18일에는 도쿄에 남아있던 조직원 시바노 하루히코가 경찰서 습격 중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1971년 연말, 최고 간부인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는 조직원들을 "공산주의화된 혁명 전사"로 만들기 위한 이념 투쟁, 즉 '총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4] 이는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점차 폭력적인 방식으로 변질되어 이후 산악 베이스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내부 숙청으로 이어지게 된다.

2. 1. 2. 산악 베이스 구축과 내부 숙청

1970년대 초, 연합적군의 전신인 일본공산당(혁명좌파) 가나가와현위원회(언론 통칭 게이힌 안보공투)와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는 각각 연쇄 은행 강도 사건과 모오카 총포점 습격사건 등을 일으켜 자금과 총기, 탄약을 확보하고 도주 행각을 벌였다.[1] 이에 일본 경찰은 도시 지역에서 철저한 직무 질문과 아파트 거주자에 대한 전수 조사(롤러 작전)를 실시하고, 전국적인 수사 강화[1]를 통해 이들의 행방을 총력을 다해 추적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들 조직원들은 군마현의 산악 지대에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거점으로 '산악 베이스'(하루나산, 가쇼산, 묘기산 산기슭 등[4])를 구축하고 연합적군을 결성했다.[1] 이들은 산악 베이스에 잠복하며 도피를 계속했지만, 곧 경찰의 산악 수색 작전(산사냥)이 시작되고 외부로부터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조직은 점차 고립되고 쇠퇴해갔다.

1971년 연말부터 1972년[5] 사이, 산악 베이스에서는 최고 간부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의 주도로 '총에 의한 섬멸전'을 수행하는 '공산주의화된 혁명 전사'가 되기 위한 명목의 '총괄'이 요구되었다.[4] 이 과정에서 동료들 사이에서는 상대의 인격까지 파고드는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이 강요되었고, 이는 점차 폭력으로 비화했다. '총괄'에 집중시킨다는 명분 아래 구타와 폭행, 혹한의 야외에서의 속박, 식량 배급 중단(절식 강요) 등[5]의 비인간적인 행위가 자행되었다. 그 결과,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2명에 달하는 동료 조직원들이 내부 숙청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참극(산악 베이스 사건)이 벌어졌다.[5]

같은 시기, 군마현 경찰은 350명을 동원해 대규모 산악 수색을 개시하며 연합적군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1972년 2월 15일, 경찰이 하루나 베이스의 흔적을 발견하고[4] 이어 가섭 베이스 터까지 찾아내자, 위기감을 느낀 남은 조직원들은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고 간부였던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는 2월 17일 경찰에 체포되었다.[5] 이처럼 산악 베이스에서의 내부 숙청과 연이은 체포 및 이탈 등으로 인해, 초기에 29명이었던 연합적군 멤버는 아사마 산장 사건 발생 직전에는 사카구치 히로시(25세), 반도 구니오(25세), 요시노 마사쿠니(23세), 가토 지로(19세), 가토 사부로(16세) 등 5명만이 남게 되었다.[5]

2. 2. 1972년

1972년 2월에 들어서면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군마현연합적군의 산악 베이스들이 차례로 발각되었다. 2월 15일 하루나 베이스(榛名ベース)의 소각 흔적이 발견되었고, 곧이어 가섭산 베이스(迦葉山ベース) 터도 경찰에 의해 확인되었다.

베이스 발각 후, 사카구치 히로시 등 잔존 멤버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인접한 나가노현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렌터카 고장으로 경찰과 조우하여 일부 멤버가 체포되고, 남은 멤버들은 험준한 산길을 통해 탈출을 감행했다. 한편, 자금 조달 및 연락을 위해 도쿄에 갔던 최고 간부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는 2월 17일, 군마현 묘기산(妙義山) 부근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가루이자와로 넘어온 연합적군 멤버들은 2월 19일 오전, 식량 조달을 위해 가루이자와역으로 내려갔다가 4명이 추가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장기간 도피 생활로 행색이 남루하고 악취를 풍기는 것을 역 매점 직원이 수상히 여겨 신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16][17]

결국 사카구치 히로시(당시 25세), 반도 구니오(25세), 요시노 마사쿠니(23세), 가토 노리타카(19세), 가토의 동생(16세) 등 5명의 멤버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라디오를 통해 동료들의 체포 소식을 듣고 가루이자와 레이크 뉴타운 부근으로 이동하여 잠복하던 중, 2월 19일 오후 3시경 카와이 악기 제작소 건강보험조합 소유의 휴양 시설인 '아사마 산장'(浅間山荘)에 침입했다. 산장 안에는 관리인의 아내 무타 야스코(당시 31세)가 혼자 있었고, 5명은 그녀를 인질로 잡고 산장 건물을 점거,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6]

경찰은 즉시 산장을 포위하고 투항을 권고했으나 범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경찰은 산장의 전기 공급을 차단하고 확성기를 통해 범인들의 부모를 동원하여 투항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9] 인질극이 장기화되자 경찰은 강제 진압을 결정하고, 2월 28일 오전 10시, 철거용 볼이 장착된 크레인과 기동대를 투입하여 진압 작전을 개시했다.

사건 당시 경찰이 산장을 돌파하는 데 사용한 철거용 볼. 현재 기념비와 함께 이 지역에 전시되어 있다.


경찰은 산장 벽을 부수고 최루탄을 투척하며 진입을 시도했으나, 범인들은 엽총, 라이플총, 권총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며 사제폭탄을 투척했다. 경찰은 고압 살수차로 물을 뿌리며 범인들을 압박했지만, 총격전으로 인해 진압 작전은 난항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2명(나가노현 경찰본부 제2기동대 소속 다카미 시게미쓰 경감, 경시청 제9기동대 소속 우치다 히사타카 경시)과 현장에 무단으로 접근했던 민간인 1명이 범인들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경찰관 15명이 부상을 입었다.[12] 범인 중 반도 구니오는 경찰관의 눈에 총을 쏘아 실명시키는 중상을 입혔다.

사건 발생 10일째인 2월 28일 저녁 6시 15분경, 경찰은 마침내 최상층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고 범인 5명 전원을 체포했으며, 인질 무타 야스코를 무사히 구출했다. 사건 발생 280시간 만이었다. 인질은 장기간 침대에 묶여 있었으나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13]

사건 당일 저녁, 반도 구니오의 아버지는 아들의 범행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오쓰시의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13] 사건의 무대가 된 아사마 산장은 카와이 악기 제작소 건강보험 조합이 소유한 '가루이자와 보양소 아사마 산장'으로, 가루이자와 레이크 뉴타운 내에 위치했다. 이 지역은 한때 인기 리조트 별장지였으나, 사건 이후 쇠락하여 현재는 일부 시설만 남아 조용한 별장지로 유지되고 있다.

2. 2. 1. 경찰의 추적과 가루이자와로의 도주

1970년대 초 연합적군의 전신인 일본공산당(혁명좌파) 가나가와현 위원회(통칭 게이힌 안보공투)와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는 연쇄 은행 강도 및 총포점 습격 사건을 일으키며 자금과 무기를 확보하고 도주하고 있었다. 경찰은 도시 지역에서 직무 질문 강화와 아파트 거주자 대상의 전수 조사를 실시하며 이들의 행방을 추적했다. 특히 1971년 2월은 '수사 강화 월간'으로 지정되어 전국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던 연합적군 멤버들은 군마현 산악 지대에 '산악 베이스'라는 은신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외부와의 연결이 끊기고 경찰의 '산사냥'(山狩り, 산악 수색 작전)이 시작되면서 조직은 점차 고립되고 약화되었다. 1971년 말부터는 최고 간부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의 주도로 '총괄'이라는 명목 아래 잔혹한 내부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에 대한 폭행, 고문, 살해가 자행되었다. 영어 자료에 따르면, 나가타와 모리는 8명의 연합적군 멤버와 비회원 1명을 구타 살해했으며, 다른 6명은 나무에 묶여 혹한 속에서 동사했다고 한다.[5] 군마현 경찰은 350명을 동원한 대규모 산사냥을 개시하며 연합적군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1972년 2월 15일, 인근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하루나 베이스의 소각 흔적을 발견했다. 묘기산 베이스에 있던 사카구치 히로시 등은 라디오 뉴스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카구치는 가섭산 베이스 해체를 지시하고, 자금 조달차 도쿄에 가 있던 모리, 나가타와 합류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려 했다.

사카구치, 우에가키 야스히로 등 5명은 렌터카로 출발했으나 묘기호 근처에서 차가 진창에 빠졌다. 수색 중이던 경찰관 2명에게 발견되어 직무 질문을 받게 되자, 지명수배 중이던 사카구치 등 3명은 경찰이 한눈을 판 사이 도주했고, 차에 남겨진 2명은 9시간의 농성 끝에 체포되었다. 베이스로 돌아온 사카구치는 남은 6명의 멤버와 합류하여 총 9명이, 경찰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접한 나가노현사쿠시 방면으로 산을 넘어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2월 16일 추정) 경찰은 가섭산 베이스 터도 발견하며 연합적군의 행적을 파악해 나갔다. 가루이자와 경찰서는 서장을 포함한 인원이 와미토게(和美峠)에서 경계했지만, 연합적군 멤버들은 경찰의 경계를 피해 험준한 계곡 루트를 택해 이동했다. 헬리콥터와 경찰차를 피해 눈 덮인 산길을 헤매던 이들은 결국 길을 잃고 우연히 가루이자와로 들어서게 되었다. 경찰은 야간 이동 중인 멤버들의 손전등 불빛이나 발자국을 발견했지만, 직접적인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도쿄에 있던 모리와 나가타는 베이스 발견 소식을 듣고 사카구치 등과 합류하기 위해 묘기산 베이스로 향했으나 이미 이들이 떠난 뒤였다. 2월 17일, 산을 수색하던 경찰관에게 발견되어 저항 끝에 체포되었다.

2월 19일 오전, 산속에서 밤을 보낸 연합적군 멤버 중 우에가키 등 4명이 식량 조달을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가루이자와역의 열차 내에서 장기간 목욕하지 않아 악취를 풍기는 등 수상한 행색으로 인해 역 판매점 점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직무 질문을 받게 되었다.[16][17] 이들 중 일부는 사제폭탄과 실탄 소지가 발각되어 총포도검류소지등단속법 위반으로, 다른 이들은 엉터리 주소를 둘러대다 현지 출신 경찰관에게 간파당하고 도주를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이로써 29명이었던 연합적군 멤버는 산악 베이스에서 12명 사망(숙청), 4명 탈주, 모리·나가타 포함 8명 체포, 가루이자와역에서 4명 체포되어, 사건 직전에는 사카구치 히로시(25세, 도쿄수산대학 중퇴), 반도 구니오(25세, 교토 대학 출신), 요시노 마사쿠니(23세, 요코하마 국립 대학 4학년), 가토 지로(19세), 가토 사부로(16세, 지로의 동생) 등 5명만 남게 되었다.[5] 레이크 뉴타운 부근 설동에 숨어있던 이들 5명은 라디오를 통해 동료 4명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가루이자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들은 즉시 이동을 시작했고, 경찰 또한 체포된 멤버들의 진술을 통해 수사망을 레이크 뉴타운 방면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2. 2. 2. 아사마 산장 점거

군마현의 산악 베이스에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던 연합적군 멤버들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1972년 2월 나가노현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경찰의 경계를 피해 험준한 산길을 택했으나, 혹한과 장비 부족으로 길을 잃고 우연히 가루이자와에 도착하게 되었다.

2월 19일 오전, 식량 조달을 위해 가루이자와역으로 내려갔던 멤버 4명이 열차 내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장기간 목욕을 하지 않아 악취를 풍기던 점을 역 매점 직원이 수상히 여겨 신고한 것이 발단이었다.[16][17] 이로써 연합적군 잔당은 사카구치 히로시, 반도 구니오, 요시노 마사쿠니, 가토 노리타카, 가토의 동생 등 5명만 남게 되었다.

라디오를 통해 동료들의 체포 소식을 접한 5명은 자신들이 가루이자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이들은 카와이 악기 제작소 건강보험조합 소유의 휴양 시설인 '아사마 산장'(浅間山荘, 아사마 산소)을 발견하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산장 안에는 관리인의 아내였던 무타 야스코(당시 31세)가 혼자 있었다. 남편은 개를 산책시키러 나갔고 투숙객들은 스케이트를 타러 간 상태였다. 5명의 멤버들은 무타를 총으로 위협하여 인질로 잡고 산장 건물을 점거,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6]

아사마 산장은 인근 아사마 산의 이름을 딴 3층짜리 목조-콘크리트 건물로, 언덕 중턱에 지어져 아래쪽의 가파른 눈 덮인 비탈길 위에 솟아 있었다. 강화 콘크리트 기초 위에 지어졌고, 위층이 아래 두 층보다 약간 더 넓은 버섯 모양 구조였다. 창문에는 두꺼운 덧문이 달려 있었고, 미로 같은 내부 구조와 좁은 계단은 방어에 유리했다. 점거범들은 주로 위층에 머물렀으며, 문과 창문 주변에 큰 가구와 요 등을 쌓아 철사로 고정하며 바리케이드를 강화했다.[7]

얼마 후, 산책에서 돌아온 관리인 남편이 바리케이드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뒤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신속하게 산장 주변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건물을 포위하여 점거범들의 도주로를 차단했다.[8] 이로써 아사마 산장 인질 농성 사건이 시작되었다.

3. 사건의 경과(아사마 산장에의 농성에서 제압까지)

1972년 2월 19일, 일본의 신좌익 단체인 연합 적군 잔당 멤버 5명이 나가노현 카루이자와정에 위치한 카와이 악기 소유의 휴양 시설인 '아사마 산장'(浅間山荘일본어)에 침입하여, 산장 관리인의 아내 무타 야스코(牟田泰子|무타 야스코일본어, 당시 31세)를 인질로 잡고 농성을 시작했다.[6] 이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던 중이었으며, 산장 내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과 대치했다.[6][32]

아사마 산장은 언덕 중턱에 위치한 3층짜리 목조 콘크리트 건물로, 강화 콘크리트 기초와 두꺼운 외부 덧문, 미로 같은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요새와 같은 형태였다.[7] 범인들은 주로 주변 조망이 좋은 위층에 머물며 가구와 요 등으로 창문과 문을 막고 농성 준비를 했다.[7]

인질의 남편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즉시 산장을 포위하고 검문소를 설치했다.[8] 초기에는 범인들의 자진 투항을 기다리며 설득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3일 후 산장의 전기를 차단하고 확성기를 통해 범인들의 부모가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9] 하지만 범인들은 암호명을 정해 사용하고[32] 경찰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채 총격을 가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뉴스를 접한 범인 일부는 자신들의 투쟁 명분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32][13]

사건 발생 7일째인 2월 25일부터 경찰은 강경 진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철거용 볼이 장착된 크레인, 장갑차, 방수차 등을 동원하고, 야구 투구 머신으로 돌을 던져 범인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였다.[10]

사건 발생 열흘째인 2월 28일 오전, 경찰은 최후 통첩 후 강행 돌입 작전을 개시했다.[11] 크레인의 철거용 볼로 산장 벽을 부수고 기동대가 진입을 시도했으나, 범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작전은 난항을 겪었다. 범인들은 총기와 수제 폭탄으로 경찰에 맞섰고, 이 과정에서 경찰 지휘관 2명(다카미 시게미쓰 경부(사망 후 경시정 특진),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사망 후 경시장 특진))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접근한 민간인 1명이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기동대원 26명과 언론인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2][32] 경찰은 고압 방수와 최루탄을 사용하며 압박을 계속했고, 치열한 공방 끝에 오후 6시 15분경,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범인 4명을 체포하고 인질을 무사히 구출했다.[13]

인질은 약 219시간(9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 경찰 포위 하 인질극 중 최장 기록이었다. 인질은 큰 부상 없이 구출되었고, 범인들이 자신을 학대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13] 사건 당일 저녁, 범인 중 한 명인 반도 쿠니오의 아버지가 아들의 행동에 비관하여 시가현 오쓰시 자택에서 자살하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13]

이 사건은 혹한 속에서의 격렬한 총격전, 부상당한 기동대원의 모습, 철거용 볼을 이용한 산장 파괴 등 충격적인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2월 28일 진압 작전 중계는 NHK와 민영방송 합계 시청률이 89.7%(비디오리서치, 간토 지역 조사)에 달하는 등 전례 없는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NHK의 당일 보도 특별 프로그램은 평균 시청률 50.8%를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 보도 특별 프로그램 시청률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3. 1. 2월 19일

연합 적군 잔당 5명은 묘기산 설동에서 탈출한 후, 자신들이 카루이자와의 새로운 별장지인 '카루이자와 레이크 뉴타운' 외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개발 중이어서 그들이 가진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32]

1972년 2월 19일 정오 무렵, 이들은 레이크 뉴타운에 있던 무인 '사츠키 산장'에 침입해 식량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인근 별장을 수색하던 나가노현 경찰 기동대 1개 분대(5명)가 산장 내 인기척을 감지하고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32] 사카구치는 이에 응하지 않고 경찰을 향해 발포했고, 경찰도 즉시 권총으로 응사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요시노도 총격에 가담했다. 카토 린쿄는 경찰관을 포위해 순찰차를 빼앗아 도주하자고 제안했지만, 사카구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32]

오후 3시 10분경, 현장에서 범인 발견 및 교전 상황이 긴급 보고되었다. 당시 다른 회의로 부재중이던 서장을 대신해 카루이자와 경찰서 서장실에 있던 경비 제2과장 기타하라 카오루아키가 순찰차로 현장에 급히 향하며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하고 현장 통신망 정리를 지시했다.[32]

오후 3시 20분경, 연합 적군 대원들은 사츠키 산장에서 총을 쏘며 빠져나와 차량이 있는 집을 찾던 중 아사마 산장을 발견했다. 이 산장은 카와이 악기 제작소 소유의 휴양 시설이었다.[6] 이 과정에서 기동대원 2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6][32] 가장 먼저 산장에 침입한 사카구치는 당시 남편과 투숙객들이 외출 중이어서 혼자 있던 관리인의 아내 무타 야스코(牟田泰子|무타 야스코일본어, 당시 31세)를 발견했다.[6] 사카구치는 총으로 위협하며 "소란을 피우거나 도망치지 않으면 해치지 않겠다"고 말하며 그녀를 인질로 삼아 산장에 농성하기로 결정했다.[6][32]

요시노는 인질을 잡는 것에 반대하며 차를 빼앗아 도망치자고 제안했다. 사카구치는 인질을 이용해 경찰에게 이미 체포된 리더 모리 쓰네오와 나가타 히로코의 석방과 자신들의 도주를 보장받으려 했으나, 요시노의 반대로 이 계획은 포기했다. 하지만 모두 식사를 하지 못한 점, 사카구치 자신이 우에가키(植垣)에게 신발을 빌려줘 제대로 신지 못한 점 등을 들어 산장에 머물자고 주장했고, 반도도 동조했다. 결국 요시노가 사카구치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성이 결정되었다.[32]

사카구치가 인질에게 자동차 열쇠의 위치를 물었으나, 외출한 남편이 가지고 있다는 답변을 듣고 차량 탈출 계획도 포기했다. (참고로 5명의 대원 중 운전면허 소지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사건 후 차 열쇠는 산장 현관에서 발견되었다.)[32] 사카구치는 인질에게 "당신은 인질이 아니라, 우리가 도움을 요청한 산장 관리인이다"라고 설명했는데, 이후 이 말에 얽매여 인질을 협상 카드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32]

인질의 남편이 귀가하여 바리케이드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뒤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8] 경찰은 즉시 산장 주변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포위하여 범인들의 도주로를 차단했다.[8] 하지만 인질이 잡혀 있고, 충분한 경찰력이 도착하지 않았으며, 다른 연합 적군 잔당의 합류 가능성도 우려되어 즉각적인 진입 작전은 보류하고 설득을 시도했다. 그 사이 연합 적군 대원들은 산장 내부에 큰 가구와 요 등을 이용해 문과 창문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며 농성 준비를 강화했다.[7][32]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연합 적군 리더 모리 쓰네오는 시부카와 경찰서에서 사건 발생 소식을 듣고, 경찰이 범인들을 사살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자신이 직접 현장에 가서 농성 중인 대원들을 설득해 투항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경찰 측에서 설득에 앞서 진술을 먼저 요구했고, 모리가 이를 거부하면서 제안은 무산되었다. 모리는 훗날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패배주의", "항복주의"라며 자아비판했다.[32]

3. 2. 2월 20일

2월 20일 아침 식사 후, 사카구치, 반도, 요시노 마사쿠니 3명은 향후 방침을 협의했다. 요시노는 경찰 포위망을 강행 돌파할 것을 주장했으나, 다른 두 사람의 반대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는 항전하다 살해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체포 후 증언했다. 사카구치는 인질을 자신들의 도주 협상에 이용하는 것을 한때 제안했지만, 전날 인질에게 인질로 삼을 의도가 없다고 설명했던 점과 산악베이스 사건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라도 경찰 권력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 생각을 철회했다.

사카구치는 “여기서 철저히 항전한다. 하루라도 더 총격전을 벌이고, 경찰관에게 항복하지 않고, 하루라도 더 항전을 계속하는 데 의의가 있다”라고 말했고, 반도와 요시노도 이에 동의했다.[32] 요시노가 “철저히 항전할 거라면 인질은 필요 없지 않은가?”라며 인질 석방을 제안했지만, 사카구치는 신원이 발각될 것을 이유로 거절했다.[32] 실제로는 오랫동안 항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카구치는 협의 결과를 가토 형제에게도 설명했다.

범인들은 산장 안의 식량으로 한 달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관리인으로부터 산장에 약 20일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고, 게다가 6명의 숙박객을 위해 식량을 추가로 사들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경찰은 식량 차단을 통한 압박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설득 작업을 시작했다.

오전 8시 40분과 46분, 범인들은 상공의 헬리콥터를 향해 총을 발포했다. 오전 11시 무렵부터는 경찰 장갑차 안에서 인질의 남편이나 친척들이 인질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질을 묶고 입에는 손수건을 넣어 소리가 나지 않도록 했지만, 이날 오후 사카구치가 독단적으로 밧줄을 풀었다. 전날 인질에게 인질로 삼을 의도가 없다고 말했던 것과, 인질의 묶인 모습이 산악베이스 사건에서 묶인 채 린치당해 죽은 동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카구치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지만 다른 구성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인질과 함께 식사를 했다. 가토의 남동생이 전기밥솥에서 밥이 갓 지어지자마자 먹으려고 하자 인질이 “밥은 조금 그냥 두었다가 먹는 것이 더 맛있어요”라고 타이르자, 가토의 남동생은 순순히 따랐다. 밥이 뜸이 들기를 기다린 후 인질의 “이제 괜찮겠죠”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먹는 등 범인과 인질 사이에 약간의 잡담이 있었다고 한다.

3. 3. 2월 21일

2월 21일, 산장에 있던 범인 5명은 도청이나 인질로부터 신원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각자의 암호명을 정했다. 암호명은 사카구치 히로시(坂口弘일본어)는 “아사마”, 반도 구니오(坂東國男일본어)는 “다테야마”, 요시노 마사쿠니(吉野雅邦일본어)는 “후지산”, 가토 린쿄(加藤倫教일본어)는 “아카기”, 가토의 동생(가토 모토히사)은 “기리시마”였다. 범인들은 선동 연설도 하지 않고 전화에도 응답하지 않았으며, 경찰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산장에 틀어박혀 총을 쏘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이어갔다.

오후 2시경, 인질의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격려 편지와 과일을 전달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이에 제9기동대장 오쿠보 이세오(大久保伊勢夫일본어) 경시가 맨몸으로 산장 현관 앞에 과일 바구니를 놓았으나, 범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바구니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범인들은 과일 바구니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하여 받지 않았다.[32]

한편, 경찰은 앞서 범인들이 머물렀던 さつき山荘|사쓰키 산장일본어에 남겨진 지문에서 요시노의 것을 발견했고, 요시노와 함께 행동했던 사카구치 역시 현장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두 사람의 가족을 불렀다. 오후 5시경, 사카구치와 요시노의 어머니가 현장에 도착하여 아들들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했다. 범인들은 모두 침실에서 어머니들의 호소를 듣고 있었다. 이때 사카구치는 인질에게 “내 고향은 화원을 하고 있어. 시골이라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라며 평소와 달리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저녁 7시, 산장 안 텔레비전에서 미국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는 뉴스가 나왔고, 이를 본 범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가토 린쿄는 당시의 심정을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와 많은 동료들이 무장 투쟁에 참여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미국베트남 침략에 일본이 가담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중국까지 확대되어 아시아 전체를 휘말리고, 나아가 세계 대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흐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무장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했던 그 대전제가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여기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이상, 이 싸움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지고, 내가 저질렀던 일에 대한 후회가 싹트기 시작했다.''

저녁 7시 30분경,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한 남자가 산장에 접근하려다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니가타시에서 스낵바를 운영하는 민간인이었으며, 경찰은 그에게 엄중 주의를 준 뒤 밤 11시 20분에 석방했다.

3. 4. 2월 22일

2월 22일 오전, 요시노의 어머니가 설득을 시도하던 중 총성이 울렸다. 요시노의 어머니가 "어머니를 쏠 수 있느냐"고 외치자 요시노는 추가로 발포했다. 총탄은 요시노의 어머니가 타고 있던 장갑차에 맞고 튕겨 나갔다. 눈물을 보이는 요시노에게 사카구치는 "자네 어머니는 인텔리이니 잘 말씀드릴게"라고 말했으나, 훗날 이를 후회했다고 한다.

정오경, 화가인 남성과 SBC 기자가 경계선을 넘어 산장에 접근하려다 붙잡히는 소동이 있었다. 이 틈을 타 전날 경찰 포위를 통과했던 민간인 남자가 다시 산장 현관 앞에 나타나 자신을 "문화인"이라 칭하며 인질의 대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전날 오쿠보 이사오 경시가 놓아둔 과일 바구니를 들고 범인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산장 내부에 "이 사람은 경찰관이 아니다. 민간인이니 쏘지 말라"고 외쳤다. 사카구치는 그가 사복 경찰관이 아닌지 의심하며 감시했고, 요시노가 위협 사격을 했으나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카구치는 남자가 기동대에게 윙크하는 등의 행동을 보고 더욱 의심하여 권총으로 저격했다. 남자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자력으로 계단을 기어올라 기동대원들에게 보호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총알이 뇌에 박혀 있었고 이후 상태가 악화되어 3월 1일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범인들이 38구경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4시 40분경, 요시노와 반도의 발포로 경찰관 2명이 부상당했다. 초망원 렌즈가 없던 나가노현 경찰 감식반원들이 현장 판단으로 관동관구 기동대 특형차 뒤에 숨어 산장에 접근하려 했으나, 차량 속도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얼어붙은 길에 발이 빠지는 등 차체 엄폐물에서 노출되어 저격당했다. 먼저 분대장이 산탄에 오른쪽 무릎을 맞았고, 쓰러진 분대장을 구출하려던 다른 대원도 중상을 입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실수로 인해 경찰 내부에서 나가노현 경찰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나가노현 경찰 본부장 노나카 하지메의 판단에 따라 지휘 계통에서 막료단이 배제되고 산장 주변 경비는 경시청 기동대에 맡겨지게 되었다.

20시 10분, 경찰은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뉴스를 보여주기 위해 유지했던 산장의 전기를 차단했다. 산장 내부는 어둠에 잠겼고, 외부에서는 투광기로 산장을 비추었다. 산장에서 몇 발의 총성이 있었으며, 이후 전기는 끊겼지만 가스와 수도는 계속 공급되었다.

23시 16분, 투광기 조명등 하나가 산장에서 발사된 총에 맞아 파괴되었다.

이날 경찰은 산장 대문 앞에 메가폰을 놓고 범인들에게 정치적 주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인질극을 벌이면서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는 범인들의 침묵이 경찰에게는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요시노는 연설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사카구치는 "잠자코 저항하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 된다"며 거부했다.

3. 5. 2월 23일, 24일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날짜에 대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음)

3. 6. 2월 25일, 26일

2월 25일 심야부터 경찰은 녹음된 총격음 등을 이용한 위장 공격과 투석 작전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범인들은 불면 상태에 놓였다.

2월 26일, 전날 밤부터 짙은 안개가 끼자 요시노 마사쿠니는 이를 이용한 탈주를 제안했다. 그러나 배수관과 정화조 등을 조사한 결과 탈출 경로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오전 9시 30분, 인질의 친척이 다시 한번 석방을 호소했다. 인질이 사카구치 히로시에게 "얼굴이라도 좋으니 내보내 달라"고 간청했지만, 사카구치는 이를 거부했다. 인질이 "왜 목숨을 함부로 다루는가"라고 묻자, 사카구치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인질은 자신을 방패로 삼지 말 것과, 재판이 열릴 경우 자신을 증인으로 부르지 말 것을 요구했고, 사카구치는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승낙했다. 사카구치가 인질의 가방에 있던 젠코지(善光寺)의 부적을 건네주자, 인질은 스스로 목에 걸고 침대에 누웠다.

반도 구니오는 현관 오른쪽에 있는 경찰 기동대를 보고 "폭탄을 던져 쓰러뜨린 후, 부상당한 경찰을 끌고 와 인질로 삼자"고 제안했다. 사카구치는 "묶어서 북쪽 베란다에 매달아 놓자"며 동의했지만, 폭탄을 던질 구멍을 뚫지 못해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현관문의 가스관을 열어 기동대가 진입할 때 폭파시키자는 방안도 논의되었으나, 현관문의 통풍이 잘 되어 이 역시 포기했다.

저녁에는 산악 베이스 사건의 희생자 테라오카 고이치(寺岡恒一)의 부모가 현장에 도착하여 오후 6시 40분부터 아들의 석방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범인들은 모두 침실에 모여 이 호소를 들었다. 테라오카의 부모와 경찰 모두 테라오카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가 산장 안에 살아있다고 믿고 있었다. 호소를 듣던 범인 중 누군가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부모를 부르다니"라고 말했다. 사카구치는 이 말을 들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의 압박감"을 느꼈다고 후에 술회했다.

밤이 되자, 반도가 음식을 몰래 먹는 것을 본 요시노는 사카구치에게 반도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반도에게 총괄을 요구했다. 사카구치는 산악 베이스 사건에서 희생된 요시노의 아내 문제를 거론하며 요시노에게 총괄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최종적으로는 사카구치의 재촉을 받은 반도가 자기 비판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범인들은 인질에게 경찰 측이나 범인 측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말하는 사카구치에게 인질은 "왜 그렇게 목숨을 함부로 다루느냐"고 물었다. 사카구치가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대답하자 인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범인들의 요구에 따라 "중립을 지키겠다"고 답했지만, 사카구치의 눈에는 그 말이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3. 7. 2월 27일, 28일

2월 27일, 전날에 이어 요시노의 부모와 테라오카 고이치의 아버지가 산장 밖에서 호소했다. 오후에는 라디오에서 사건 관련 방송이 중단되었는데, 이는 언론사 간에 「연합적군 사건에 관한 취재·보도 협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26일과 27일 이틀간 경찰의 접근 시도가 형식적이라고 판단한 범인들은 함께 모여 경찰의 다음 대응을 논의했다. 뚜렷한 결론은 내지 못했지만, 다음 날인 28일에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32]

2월 28일 새벽 5시, 경찰의 투석이 멈췄다. 오전 9시, 경찰은 투항을 권고했다. 같은 시각, 요시노는 아사마 산장 옆 호시 산장에서 기동대원 여러 명이 무방비 상태로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산탄총을 겨누었으나, 쏘지는 않았다. 요시노는 훗날 이를 "'죽인다'는 것에 대한 주저함이 있었다"고 회고하며, 이로 인해 자신이 '혁명 전사'가 되지 못하고 생포된 것이라 생각했고, 동지들에게 죽음을 요구했던 것을 잘못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오전 9시 55분 최후 통고 후, 10시에 기동대가 산장 진입을 시작했다. 10시 7분, 범인들이 이날 처음으로 발포했고, 기동대원의 대형 방패에 총탄이 맞으며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경찰은 몽켄이라는 파괴 장비로 산장 현관 옆 계단 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강한 물줄기를 쏘아 넣었다.

오전 11시 27분경, 방수를 지휘하던 경시청 특과 차량대 중대장 다카미 시게미츠 경부(사망 후 경시정으로 특진)가 범인의 총격(요시노 또는 반도 중 한 명으로 추정되나 재판에서 특정되지 않음[33])에 맞아 1시간 뒤 사망했다. 이는 사건의 '''두 번째 희생자'''였다. 사카구치는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들었지만, 누가 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32]

오전 11시 47분경, 제2기동대 소속 전령 순사가 반도의 저격으로 왼쪽 눈에 총탄을 맞아 실명했다.

오전 11시 54분경, 3층 주방에 진입하여 지휘하던 제2기동대 4중대장 경부가 요시노와 가토 린쿄의 저격으로 머리에 총탄을 맞았다. 사카구치는 법정 진술 전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32]

오전 11시 56분경, 제2기동대 대장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사망 후 경시장으로 특진)가 반도의 저격에 피격되어 오후 4시 1분에 사망했다. 이는 '''세 번째 희생자'''였다.

우치다 경시의 중상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산장 안에 전해지자, 인질은 "총 쏘지 마세요. 사람 죽이지 마세요. 저를 방패 삼아서라도 밖으로 나가세요"라고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사카구치는 이 말에 동요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세면대와 다락방에 있는 동료들에게 "어이, 위쪽(계급 높은 경찰)을 해치웠다"고 전했다[32]

오후 12시 30분경, 경찰의 작전이 잠시 중단되자 범인들은 모두 침실에 모여 파괴된 벽 구멍을 응급 처치하고 식사를 했다. 이 무렵 가토 린쿄는 이미 싸울 의지를 잃고 있었으며, 사건이 빨리 끝나 동생의 죄가 더 무거워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한다.

오후 12시 45분경, 산장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던 보도진에게 사카구치가 위협 사격을 가했다. 판결에서는 사카구치가 '살의를 가지고' 발포했다고 인정되었다. 신에쓰 방송 기자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카구치는 놀랐다고 한다[32]

오후 2시 40분경, 주방에 모인 기동대를 발견한 요시노의 제안으로 사카구치가 철파이프 폭탄을 투척했다. 이 폭발로 제2기동대 4중대 분대장이 오른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다른 4명은 전치 수일의 청각 장애를 입었다.

오후 3시 30분경, 경찰의 방수가 재개되었고, 발사된 가스탄으로 인해 산장 내부는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숨쉬기 어려워진 사카구치가 창문을 부수고 나왔을 때, 눈앞에 보이는 아사마산을 보고 현장 이름의 유래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32]

오후 3시 58분경, 제2기동대 제2소대 순사 2명이 범인 중 한 명(사카구치, 반도, 요시노 중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음[33])의 총격으로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

오후 5시경, 기동대가 침실에 접근하여 바리케이드를 조금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20분경, 제9기동대 순사가 사카구치와 반도의 총격으로 피격되었다[33].

오후 5시 55분경, 제9기동대 순사부장이 사카구치, 반도, 요시노의 난사로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33].

마침내 침실 벽에 구멍이 뚫리고, 28명의 기동대원이 돌입했다. 오후 6시 10분경, 범인 검거를 위해 가장 먼저 돌입한 제9기동대 순사가 반도가 근거리에서 쏜 총에 오른쪽 눈을 맞아 실명했다[33].

그 직후 기동대가 완전히 진입하여 오후 6시 10분, 범인 전원이 체포되었고 인질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범인들은 연행되는 동안 보도진의 욕설을 들었다. 이때 사카구치는 산을 넘으며 신발이 찢어진 동료에게 자신의 신발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맨발로 걸어갔다고 한다[32]

가토 린쿄는 연행될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중에 전원 연행될 때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네 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나는 단지 앞을 똑바로 보고 걷기로 마음먹었다. 분한 마음에 다른 네 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경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분함이 아니었다. 나는 올바른 정보 분석도 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희망으로 인민의 군대가 성장하고 내가 일어서면 차례차례 사람들이 혁명에 동참하여 약자를 억압하는 사회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 꿈꿨던, 그 자신만만함을 깨닫고 나의 어리석음에 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 6시경, 아침부터 텔레비전으로 사건 중계를 지켜보던 반도의 아버지는 아들의 체포 소식이 보도되자 자리에서 일어섰고, 잠시 후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4. 경찰의 대응

경찰은 인질의 안전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고 나가노현 경찰과 경시청 기동대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초기에는 현지 경찰과 파견 부대 간 지휘 체계 문제 등으로 혼란이 있었으나(초기 대응), 송전 중단, 최루탄 사용, 범인 친족을 통한 설득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장기간의 대치 끝에 크레인과 철구를 동원한 강행 돌입 작전을 실행하여 인질을 구출하고 범인들을 체포했지만(제압 작전), 이 과정에서 지형적 불리함, 장비의 한계, 범인들의 격렬한 저항 등으로 인해 작전이 장기화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었다(사건이 장기화된 요인).

4. 1. 초기 대응

전국을 돌며 도주를 계속한 연합적군(聯合赤軍)에 대해, 경찰청에서는 경비국·형사국·전국의 각 관구 경찰국 등이 선두에서 지휘하며 도도부현 경찰과 종합 조정을 통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연합적군 일파와 조우하여 총격전을 벌인 나가노현 경찰 기동대의 긴급 보고를 받은 나가노현 경찰 본부는 즉시 현 내 모든 경찰서에 중대 사건 발생을 알리고 동원령을 내려 가루이자와로의 지원 파견을 지시했다. 우선 산장 주변 도로를 봉쇄하고 강행 돌파를 막기 위한 경비 부대를 배치했으며, 연합적군 잔당 수색을 위한 산악 수색과 주요 간선 도로의 일제 검문 실시, 국철사철 각 노선의 검문 등 현지 경찰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연합적군 발견의 긴급 보고를 무선으로 감청한 경찰청은 즉시 고토다 마사하루 경찰청장관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중요한 방침을 세웠다. 최우선 목표는 인질의 무사 구출이었고, 범인 전원을 생포하여 체포하며, 인질 교환은 거부하고, 화기 사용은 경찰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특히 "범인을 향해 발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았다. 나가노현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경찰청과 경시청을 중심으로 한 지휘참모단 파견도 결정되었다. 고토다 청장은 2월 20일 아침 기자 회견에서 "어떻게든 인질 여성을 무사히 구출하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이 사건이 흉악 범죄임은 틀림없지만, 그들(연합적군)은 원래 지식인이니 그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신중한 작전을 취하고, 가능한 한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하고 싶다"고 밝혔다.[35]

경찰청에서는 나가노현 경찰 본부장인 노나카 이사오 경시감과 동격인 마루야마 타카시 경시감(경비국참사관)을 단장으로 하는 참모단을 파견했다. 경비 실시 및 홍보 담당 참모장에는 사사 아쓰유키 경시정(경비국 부겸 경무국 감찰관), 경비국 조사과의 기쿠오카 헤이하치로 경시정(이사관·홍보 담당), 정보통신국의 히가시노 히데오 전문관(통신 설비 및 지원 담당)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관동관구 경찰국에서도 공안부장 히구치 토시나가 경시장 등 여러 명이 파견되었다.

경시청에서도 기동대의 통합 지휘를 위해 이시카와 사부로 경시정(경시청 경비부 부), 홍보과장 쿠니마츠 타카시 경시, 우메자와 참사관(건강 관리 본부·의학박사) 등 다수의 지원 인력이 현장으로 향했다.

후일, 사사 참모장의 요청으로 경시청 경비부의 우타가와 신이치 경시(경비 제1과 주임 관리관·경비 실시 담당)가 현장 정보 담당 참모로 추가 파견되었다. 우타가와 경시는 '컴뱃 팀'이라 불리는 경시청 경비부의 현장 정보반을 가루이자와로 소집했다.

기동대의 경우, 사건 발생 당일 경시청 당번대였던 제9기동대(대장 오쿠보 이세오 경시)가 급히 가루이자와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도쿄 환경에 맞는 장비만 갖추고 있어 겨울철 가루이자와의 추위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제2기동대(대장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가 추가로 선발되었다. 제2기동대는 먼저 도착한 제9기동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한랭지 대책을 철저히 준비하고 가루이자와로 이동했다. 제2기동대가 추가 파견된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당시 제9기동대가 신설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지휘관인 이시카와 경시정과 제2기동대장 우치다 경시가 과거 상사와 부하의 관계로 서로 마음이 통하며, 게다가 제2기동대가 경시청 예비대 시절부터 활동해 온 노련한 부대였기 때문에 파견 요청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제9기동대는 현장에 도착한 제2기동대와 임무를 교대한 뒤, 잠시 도쿄로 돌아가 한랭지 장비를 보강하고 다시 가루이자와로 복귀했다. 또한 경시청에서는 방탄 대책 및 방수포 공격 지원을 위한 특과차량대(대장 고바야시 시게유키 경시)와 인질 구조 및 현장 부상자 구조 임무를 위한 제7기동대 레인저 부대(부대장 니시다 도키오 경부 지휘)도 추가로 파견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범인의 수나 인질의 안전 여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대응에 나서야 했다. 고토다 청장의 방침은 현지 나가노현 경찰 본부를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경찰청 참모단과 지원 파견된 기동대는 후방 지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가노현 경찰 본부는 대학 봉쇄 해제 경비와 같은 대규모 경비 작전 경험이 부족했고, 장비와 인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경찰청은 처음부터 나가노현 경찰 단독으로는 사건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 경찰의 텃세 의식이 강해, 전술, 방침, 경비 담당 기동대 선정 등에서 나가노현 경찰 본부와 파견 참모단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무선 통신망 전환이나 산장 정찰 방법 등 작전 지휘 계통을 둘러싼 논의도 혼란스러웠다.

결과적으로 나가노현 경찰 본부 감식과 직원 등이 상부에 보고 없이 피의자 특정을 위한 얼굴 사진 촬영 목적으로 무리하게 정찰을 시도하다가 기동대원 2명이 저격당해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경찰 포위망을 뚫고 산장에 접근하려던 민간인이 범인의 권총에 맞아(2월 24일) 사망(3월 1일)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외에도 무선 통신 시스템 미비, 강행 정찰 시 사진 촬영 미숙 등 나가노현 경찰 측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작전 지휘권은 점차 경시청 중심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4. 2. 제압 작전

포위 속에서 경찰 측은 산장에 대한 송전 중단, 소음과 물대포, 최루가스탄을 사용하여 범인들의 피로를 유도하는 작전을 펼치는 한편, 특형 경비차를 이용한 강행 정찰을 자주 실시했다. 또한, 농성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연합적군 대원들의 친족(사카구치 히로시의 어머니, 반도 쿠니오의 어머니, 요시노 마사쿠니의 부모, 테라오카 코이치의 부모)을 현장으로 불러 확성기를 통해 여러 차례 설득을 시도했다. 범인의 부모들은 설득 과정에서 사건이 진행 중이던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방문한 사실을 언급하며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닉슨 방중 뉴스는 범인들도 텔레비전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머니들의 설득을 냉담하게 듣던 기동대원들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끓는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범인들은 경찰이 부모의 정을 이용했다며 격분하여, 부모가 타고 있던 경찰 장갑차를 향해 총을 발포했다.

장시간 검토 끝에 크레인 차량에 매단 몽켄(철구)으로 산장의 지붕을 부수고 정면과 위에서 진입하여 제압하는 '철구 작전'이 입안되었다. 건물 설계도 등의 정보가 제공되면서 작전 실행이 결정되었다. 경찰은 정보 분석을 통해 3층에 범인들이, 2층에 인질이 감금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파괴 목표는 산장 3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3층의 범인들이 인질이 있는 2층(실제로는 인질도 3층에 있었다)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계단만 제한적으로 파괴하려는 의도였다. 철구의 위력이 너무 강하면 산장 건물이 통째로 파괴되어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계산된 공격이었다. 또한 강행 돌입을 앞두고 산장 내 라디오 등을 통한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언론사와 보도 협정을 체결했다.

작전 계획은 3층 정면의 총안들을 철구로 파괴하고 지붕 일부를 부순 뒤, 크레인 끝을 철구에서 철 갈고리로 교체하여 지붕을 뜯어내고, 특수 제작한 사다리를 정면 도로에서 지붕으로 연결해 위쪽에서 두 개의 결사대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아래쪽에서는 1층을 경시청 제9기동대, 인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 2층을 나가노현 경찰 기동대에서 선발된 결사대가 각각 맡아 산장 아래 입구로 진입하여 인질 구출 및 범인 검거를 시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질도 3층에 범인들과 함께 있었고, 산장 파괴 도중 크레인의 철구가 멈춰 재가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작전을 변경해야 했다. 철구 작전은 결과적으로 2층과 3층 사이의 통행을 차단하고 벽의 총안 일부를 파괴하는 데 그쳤다.

철구가 멈춘 이유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크레인 차량의 엔진이 물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라고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좁은 조종실에 탑승했던 특수차량대 대장이 배터리 터미널을 발로 차서 고장 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본래 야외 작업용인 크레인 차량이 약간의 물을 맞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당시 경시청 제9기동대장이었던 오쿠보 이세오는 훗날 철구 작전이 실패였다고 회고했다. 작전 중 크레인이 고장 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고장설에 대해 작전에 참여했던 토목업체 관계자는 고장이 아니라 차량 자체의 문제였다고 증언했다. 이 크레인 차량은 경찰 소유가 아닌 미국군 불하품을 현지 민간업체가 사용하던 것이었고, 여기에 급하게 철판을 덧대 방탄 개조를 한 것이었다. 또한 몽켄 역시 전용 장비가 아니라 일반 크레인 갈고리에 케이블로 보강하여 철구를 매단 급조품이었기에, 사실상 일회성 작동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차량을 제공하고 조종했던 시라타구미 관계자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잡지 인터뷰 등에서 밝혔다.[34][35]

2월 28일 오전 10시, 경시청 제2기동대(이하 2기), 제9기동대(이하 9기), 특과차량대(이하 특차), 제7기동대 레인저 부대(7기 레인저)를 중심으로 한 부대가 제압 작전을 시작했다. 먼저 방탄 개조된 크레인에 매달린 1ton 무게의 철구로 범인들이 만든 산장의 총안 파괴를 시도했다. 직후 2기가 지원 부대의 최루탄과 방수의 엄호를 받으며 범인들이 농성 중인 3층으로 돌입을 시작했다(1층에는 9기, 2층에는 나가노현경 기동대가 돌입했으나 범인은 없었다). 범인들은 12게이지 산탄총, 22구경 라이플, 38구경 권총을 산장 안에서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돌입한 2기 4중대(중대장 우에하라 츠토무 경부)는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며 범인들이 있는 방으로 접근했다. 작전 초기에는 순조로워 보였으나, 작전 개시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지난 시점에 철구 공격과 고압 방수를 현장에서 지휘하던 특차중대장 타카미 시게미쓰 경부와 2기 대장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가 범인의 저격에 머리를 맞고 수 시간 후 순직했다. 또한 산장 내부에서 우에하라 2기 4중대장이 얼굴에 산탄을 맞아 후퇴하는 등 진입을 시도하던 대원 여러 명이 총에 맞아 물러났다. 이러한 피해와 더불어 대원들의 충격과 혼란, 범인들의 맹렬한 사격, 크레인 철구의 작동 불능 등이 겹치면서 작전은 극심한 난관에 부딪혔다.

우치다 2기 대장이 피격된 후 경찰청으로부터 권총 사용 허가가 내려졌지만, 현장의 혼란으로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실제로는 소수의 대원만이 위협 사격을 가했을 뿐 범인에게 직접 발포하지는 않았다. 저격반도 배치되었으나, 사거리가 길고 살상력이 높은 저격총의 사용은 장관의 허가가 필요했기에 결국 사용되지 않았다. 다만 권총 사용 허가를 받은 저격반장 호사카 조지 경부가 다락방의 총좌를 향해 위협 사격을 실시했고, 이 총좌는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를 비롯한 많은 희생자를 냈으나 위협 사격 후 사수가 물러나면서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범인들은 쇠파이프 폭탄을 사용하는 등 저항을 계속했고, 경찰 측 부상자는 늘어났다. 작전 개시 5시간 반 후, 작전 본부는 대장과 중대장이 전사 또는 부상으로 지휘 체계가 흔들린 2기를 1층과 2층 담당으로 돌리고,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9기를 3층 돌입 주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또한 방수로 인해 산장 전체가 물에 잠겨 밤이 되면 범인과 인질이 동사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당일 내 인질 구출 및 범인 검거를 목표로 삼았다. 초기에는 사기 진작을 위해 부대 지휘관의 헬멧에 지휘관 표시를 했으나, 지휘관들이 연이어 저격 대상이 되자 중간에 이 표시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작전 개시 7시간 반 후인 오후 5시 30분부터는 방수를 이용해 범인들이 농성하는 방의 벽을 파괴하는 작전이 진행되었다. 오후 6시 10분, 9기 대장 오쿠보 이세오 경시의 명령으로 일제 돌입이 이루어졌고, 몇 분 후 범인 전원이 검거되고 인질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체포 당시 범인들에게는 다수의 총기와 200발 이상의 탄환, 물에 젖어 사용 불가능해진 쇠파이프 폭탄 3개, 그리고 M작전(은행 강도) 등으로 탈취한 현금 75만이 남아 있었다.

사건 해결까지 경시청 소속 타카미 시게미쓰 경부(2계급 특진 후 경시정)와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2계급 특진 후 경시장) 등 경찰관 2명, 그리고 "범인을 설득해 인질을 구출하겠다"며 산장에 접근했던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또한 기동대원과 신에쓰 방송 카메라맨 등 총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중상자 중에는 실명 등 심각한 후유증이 남은 사람도 있었다. 한편, 반도 쿠니오가 체포되기 직전 그의 아버지가 자택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아버지의 유서에는 인질에 대한 사죄와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4. 3. 사건이 장기화된 요인

'''산장 지형의 유리함'''

산장은 깎아지른 절벽에 건설되었고, 현관 앞은 평지(도로)였기 때문에 우연히도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구조였다. 또한 주변에는 장시간 감시나 휴식 등이 가능한 다른 건물이 없었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한 접근이나 진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사 아쓰유키는 저서에서 이 산장을 "쇼와 시대의 치하야 성"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범인의 교전 태세'''

범인들은 경찰의 요구를 전혀 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주장이나 요구도 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범인의 수", "범인과 인질의 산장 내 위치", "인질의 안전" 등 진입 작전에 필요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진입을 연기하고 정찰을 반복했지만, 결국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고 그 대부분은 진압 후까지 수집되지 못했다. 후에 범인 자신이나 범인을 아는 사람들은 "교환 조건을 제시할 생각은 없었고, '경찰과 섬멸전을 벌인 끝에 죽는다'는 의식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의 총기 사용 제한'''

범인이 빈번하게 발포하는 데 대해 경찰은 진입 직전까지 발포를 허용받지 못했다[36]. 경찰은 화기 사용은 경찰청 허가(총기 사용에는 경찰청의 발포 허가가 매번 필요하다)라는 제한을 두어 범인을 사살하지 않고 생포하는 방침을 세웠다. 인질의 무사 구출이 최우선 목표였고, 인질이 유탄에 맞을 우려도 있었지만, 다음 두 가지가 큰 이유였다.

  • '''범인 영웅화 우려''': 범인의 사살이나 자살 등 "경찰과의 싸움에서 범인이 사망"으로 인해 범인이 "순교자"로 신격화되어 다른 집단이나 구성원 등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1960년안보 투쟁에서 사망한 가바 미치코나 1970년의 가미아카츠카 파출소 습격 사건에서 사살된 시바노 하루히코 등의 사례가 예상되었다.
  • '''경찰관 고발 우려''': 본 사건 2년 전(1970년)에 발생한 세토나이 시재킹 사건에서는 범인을 사살한 경찰관이 일본자유인권협회 소속의 변호사로부터 살인죄 등으로 고발되었고, 그 재판의 경과를 언론은 실명·사진을 공개하며 보도했다. 사살은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고발은 불기소 처분되었지만,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경찰관은 결국 퇴직했다. 이 사건의 전례 때문에, 본 사건에서는 범인을 생포하는 방침으로 대응했다.


'''지휘관 식별 문제'''

사건 현장에서 대장·부대장의 헬멧 디자인은 지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당시에는 일반 대원과 다소 달랐다. 이 때문에 범인에게 지휘관급을 특정당해 저격당했고, 진입 부대의 지휘 체계가 붕괴되어 혼란에 빠지는 대원이 속출했다.

'''장비의 한계'''

당시에는 아직 기술적으로 방탄 방패가 개발되지 않았다. 사건에 사용된 주라민제 방패는 폭동 진압용으로 투석이나 둔기 공격 등은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었지만, 총알은 관통했기 때문에 방탄 효과를 위해 방패를 두 장 겹쳐 진입했다. 하지만 무게가 두 배가 되어 대원의 기동성이 떨어졌고, 방패의 엿보기 구멍으로는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앞서 언급한 헬멧 문제와 더불어, 전방 확인을 위해 방패에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머리를 저격당하는 사상자가 속출하여 피해를 키우는 요인이 되었다.

'''지휘 체계의 혼란'''

나가노현 경찰과 경시청 간의 관할 문제 외에도, 진입 당일 지휘관 두 명이 저격당하고, 전령과 무전수가 대장을 따라 후퇴하거나 무전기 건전지가 방전되는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지휘소의 명령이 전선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사사 아쓰유키에 따르면, 권총 사용 허가가 내려진 후에도 전선에 전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자신이 직접 전선으로 가서 허가 사실을 전달했다고 한다. 또한 오후 5시 30분부터 시작된 방수에 대해서도 사사는 최전선 지휘소에서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고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사사가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임의로 방수를 명령했다며 문제 삼는 시각도 있다.

5. 사건의 영향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일본 사회에 다방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 당시 범인들이 전원 체포되면서 연합 적군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이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산악 기지 사건 등 내부 린치 살인 사건의 잔혹성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급진 좌익 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3][24]

사건의 처절한 공방 과정과 인질 구출 작전은 텔레비전을 통해 장시간 생중계되었는데, 이는 전례 없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켰다.[14] 이 과정에서 경찰관들이 컵라면을 먹는 모습이 노출되어 컵라면이 비상식량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5][16]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출된 인질에 대한 언론의 과열된 취재 경쟁과 왜곡 보도가 심각한 2차 피해를 낳았으며, 이는 언론 윤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21][22]

이 사건과 같은 해에 발생한 텔아비브 공항 무차별 총격 사건,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 그리고 이후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등 일본 적군 및 유사 단체에 의한 테러 사건들은 일본 정부와 경찰로 하여금 대테러 역량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카 사건 당시 범인의 요구를 수용한 일본 정부의 대응이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으면서, 결국 1977년 경찰 내 특수부대 창설로 이어졌고, 이 부대는 훗날 SAT로 발전하게 된다.[38] 또한 사건 당시 지휘관 식별이 용이했던 경찰 헬멧 디자인이 저격 위험을 높인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사건 이후 헬멧 후두부의 계급선으로 식별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의 이후 행보도 주목받았다. 현장 지휘관이었던 사사 아쓰유키는 초대 내각안전보장실장을 역임하고 위기관리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가메이 시즈카는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쿠니마쓰 코우지는 경찰청 장관까지 올랐으나 재임 중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사건 범인 중 한 명인 반도 구니오는 1975년 쿠알라룸푸르 사건 당시 초법적 조치로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합류,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등 추가 테러에 가담했으며 현재까지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20] 한편,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던 조직원 중 일부는 형기를 마친 후 보수 사상으로 전향하여 자민당 당원이 되는 등 사상적 변화를 겪기도 했다.[39][40][41]

사건 현장이었던 아사마 산장은 사건 이후 약 10년간 관광 명소로 주목받았으나,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고 건물이 재건축되는 과정을 거쳤다. 현재는 홍콩에 본부를 둔 자선 단체의 소유로 알려져 있다.[42]

5. 1. 연합적군의 붕괴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의 범인 체포로 연합 적군은 간부 전원이 체포되어 사실상 붕괴했다. 체포 후 조사 과정에서 인바누마 사건·산악 기지 사건 등 동료들에 대한 린치 살인 사건이 드러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도주 중이던 다른 조직원들도 차례로 자수하거나 체포되어 모든 관련자가 검거되었다.[17][18] 당시 베트남 전쟁 장기화에 따른 반전 운동의 영향으로 연합 적군에 일부 공감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37], 이 사건과 이후 밝혀진 내부 숙청의 잔혹성으로 인해 여론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했다.[23][24] 이 사건은 몇 달 후 발생한 로드 공항 학살 사건 및 여러 납치 사건과 더불어, 일본 내 급진 좌익 학생 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증폭시켰고, 일본 좌익 운동의 규모 축소와 대중적 지지 약화로 이어졌다.[23][24]

체포된 5명의 조직원은 2건의 살인, 1건의 살인 미수, 공무집행방해, 총포·도검류 소지 등 단속법 위반, 불법 감금 등 6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4명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사카구치 히로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 6월 24일, 일본 대법원은 사카구치의 재심 청구를 기각하여 그는 현재 사형수로 수감 중이다.[17][18] 가토 삼형제 중 장남은 내부 숙청 과정에서 사망했고, 차남(체포 당시 19세)은 징역 13년을 선고받았으며, 삼남(체포 당시 16세)은 소년원에 수감되었다.[19]

1975년 8월, 일본 적군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일으킨 AIA 빌딩 인질극 당시, 일본 정부는 인질 석방의 대가로 범인 중 한 명인 반도 구니오를 초법적 조치로 석방했다. 반도는 리비아로 망명하여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20] (사카구치 히로시 역시 석방 요구 대상이었으나, 본인이 법정 투쟁을 원하여 일본에 남았다.) 이후 반도는 일본 적군으로서 1977년 9월 28일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일명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에 가담하여 일본 정부에 몸값 600만달러 지불과 수감자 9명의 석방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그는 현재까지도 도주 중이며 국제 지명 수배 상태이다.[20]

사건 이후 연합 적군 조직원들의 행적과 사상 변화도 주목받았다. BS아사히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한 전직 멤버는 친척의 "사회를 바로잡겠다면서 너희는 누구 한 명이라도 구했는가?"라는 질문에 활동을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던 한 조직원은 15년 형기를 마치고 45년 만에 언론에 등장했는데, 그는 자민당 당원이 되어 보수 사상으로 전향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락이 닿는 다른 전직 멤버들 역시 대부분 전향한 것으로 알려졌다.[39][40][41]

5. 2. 범인 석방과 재범

1975년 일본 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 당시, 아사마 산장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반도 구니오가 일본 정부의 “초법적 조치”에 의해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20] 당시 함께 수감 중이던 사카구치 히로시도 일본 적군으로부터 석방 요구를 받았지만, 스스로 법정 투쟁을 원하여 일본에 남았다.

석방된 반도 구니오는 이후 일본 적군으로 활동하며 1977년 9월 28일 다카 사건(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20] 이 사건에서 일본 적군은 일본 정부에 몸값 600만달러 지불과 함께, 초법적 조치에 의한 수감자 9명의 석방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반도 구니오는 현재까지도 도주 중이며 인터폴에 의해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20]

5. 3. 특수 부대의 창설

아사마 산장 사건과 같은 해인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에서는 일본 적군의 전신인 아랍 적군이 텔아비브 공항 무차별 총격 사건을 일으켜 범인이 자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같은 해 9월 5일 서독에서 발생한 뮌헨 올림픽 테러 사건에서는 범인의 자폭으로 인질 전원이 살해되는 비극이 벌어져 일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 경찰청은 전국의 도도부현 경찰에 통지를 보내, 총기 등을 사용한 중대하고 돌발적인 사건 발생 시 이를 제압할 수 있는 특수부대를 편성하도록 지시했다.[38]

1977년 일본 적군이 일으킨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정부는 범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직후 발생한 루프트한자 항공 181편 납치 사건에서 서독 정부가 특수부대 GSG-9을 투입하여 범인을 사살하는 강경 대응을 보인 것과 대조되면서, 일본 정부의 대응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험을 교훈 삼아 같은 해 일본 정부는 경찰 내에 납치 사건 대응을 주요 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 부대는 1996년에 SAT라는 명칭으로 정식 발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4. 언론 보도와 사회적 반향

2월 28일 오전 9시 40분부터 NHK는 저녁 8시 20분까지 인질극 상황을 생중계했다. 이 방송은 평균 50.8%, 최고 89.7%(오후 6시 26분)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14] 도쿄에서는 하루 종일 차량 통행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경찰관들이 컵라면을 먹는 모습이 알려지면서, 일본 사회에서 컵라면이 비상식량으로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15][16]

아사마 산장 사건 (2009)


사건 후 언론의 보도 경쟁은 과열 양상을 보였다. 입원 중인 인질 여성은 언론 취재가 차단된 채 나가노현 경찰의 엄중한 보호 하에 있었으나, 정신과 의사 문진과 경찰 조사 내용 등이 연이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이는 일부 기자가 병실 침대 밑에 도청기를 설치하여 경찰과 다른 언론사를 따돌리고 얻어낸 정보였으며, 배터리 교체를 위해 병원에 침입한 기자가 발각되기도 했으나, 유력 기자들의 개입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는 의혹이 있다.

3월 1일 기자회견에서 여성이 "퇴원하면 모두(※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놀고 싶다"고 한 발언 일부가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남편이 기자가 준 부적을 "범인에게 받은 것"으로 착각해 발언한 것과 맞물려, 마치 여성이 범인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눈 것처럼 왜곡 보도되었다. 이로 인해 여성은 광범위한 사회적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21] 회견 이후 여성에게 격려 편지는 급감했고, 대신 "(병원에서 우동을 먹고 싶다고 한 것에 대해) 우동이나 먹고 싶다니, 놀고 싶다니 제정신인가", "당신 때문에 경찰관이 죽었는데 무슨 생각인가"와 같은 비난과 함께 면도칼이 동봉된 협박 편지까지 받게 되었다. 주간지들은 여성의 개인 정보에 허위 사실을 섞어 '거짓 눈물 xx(여성의 이름)'나 '위선자' 등으로 매도하는 보도를 이어갔다.[21]

여성은 이후 인터뷰 등에서 "사건 발생 후 처음 며칠은 잡탕 같은 것을 하루 한 끼 먹게 되었지만, 26일경부터는 콜라 한 병밖에 받지 못했다"거나 "마치 내가 적군과 마음의 교류를 한 것처럼 쓰여 있어 놀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여성은 3월 11일,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 보도를 부인하고 감금 중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상황을 밝혔지만,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게 되었다.[22] 3월 1일 도쿄에서 순직 경찰관들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될 때, 여성은 병실에서 아사마 산장 방향으로 묵념하며 눈물을 흘렸고, 퇴원 직후에는 산장에 직접 찾아가 순직자 제단에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라고 오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은 이후 발생한 로드 공항 학살 사건 및 여러 차례의 납치 사건과 더불어, 일본 사회 내 급진 좌익 학생 운동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3][24] 연합 적군 간부 전원 체포 후 인바누마 사건·산악 기지 사건 등 동료들에 대한 린치 및 살인 사건이 드러나면서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는 좌익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내 좌익 운동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23][24]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던 한 농성범은 15년의 형기를 마치고 45년 뒤 TV에 출연하여, 현재는 자민당 당원이 되어 보수 사상으로 전향했음을 밝히기도 했다.[39][40][41]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이 사건을 다룬 2007년 영화 ''연합 적군''은 2007년 도쿄 국제 영화제 일본영화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25]

6. 재판

아사마 산장 사건의 재판은 산악 기지 사건이나 혁명좌파 단독 동지 숙청 사건인 인바누마 사건 등 각 멤버가 관련된 사건 전체에 대해 열렸다. 초기에는 사건 범인 중 중등소년원 송치가 결정된 가토의 남동생을 제외한 4명 전원이 공동 변호인단에 의한 통일 공판으로 재판에 임했다.

그러나 점차 피고인들 사이에서 사건에 대한 인식 차이와 갈등이 생기고, 반도 쿠니오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국외로 도피하면서 이탈하는 등의 사정이 겹쳐, 최종적으로는 통일공판조(사카구치 히로시, 나가타 요코, 우에가키 야스히로)와 분리공판조(요시노 마사쿠니, 가토 린쿄)로 나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통일공판조의 1심 판결에서 나카노 타케오 재판장은 이 사건을 "궁지에 몰려 도망갈 곳을 잃은 폭도가 혈기 끝에 감행한 사후 강도와 같은 만행일 뿐, 혁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를 권력에 대한 섬멸전이나 내란 목적의 전투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고 견강부회도 심하다. 여기에는 혁명의 명분은 조금도 없고, 오직 피에 굶주린 폭도의 무차별적인 살육만 있었을 뿐이다"라고 판단했다.

사카구치 히로시에 대해서는 사건의 "총지휘자"로 규정하고 "범행 전체에 공동정범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밝혔으며, 경찰관 두 명이 사살된 것만으로도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33] 통일공판조의 항소심에서도 사카구치는 "스스로 주창하고 주도하여 산장 내에서의 철저 항전을 내세우고, 거점인 침실 안에서 순차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며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고 독려하여 경찰관에 대한 살해 행위를 한 자임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 사카구치는 공범자의 행위에 대해서도 포함하여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판단되었다.[32]

이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들에 대한 최종 판결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판결비고
사카구치 히로시사형1993년 2월 19일 최고재판소에서 확정
요시노 마사쿠니무기징역
가토 린쿄징역 13년체포 당시 19세
가토의 남동생중등소년원 송치체포 당시 16세



국외로 도피한 반도 쿠니오는 현재도 국제 수배 중이며, 경찰 관계자나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반도가 체포될 때까지 아사마 산장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7. 에피소드

; 컵누들

사건 당시 현장은 평균 기온이 -15°C 안팎이었고, 기동대원들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은 얼어붙었다. 현지 주민들이 밥을 지어 대원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이는 주로 외곽 경비를 맡은 나가노현 경찰 대원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최전선의 경시청 대원들에게 배급될 때쯤에는 카레라이스조차 얼어붙어, 여전히 언 도시락만 지급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막 판매를 시작한 닛신식품컵누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간편하게 조달하고 조리할 수 있으며, 추위 속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대원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컵누들 배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사 아쓰유키의 저서에 따르면, 경시청은 컵누들을 대원들에게 정가의 절반 가격으로 판매했는데, 처음에는 나가노현 경찰이나 가나가와현 경찰 대원들에게는 판매하지 않았다. 경시청 예산으로 구매하고, 경시청이 물을 운반하고 급식차로 물을 끓였다는 이유였는데, 이는 경시청과 현경 사이의 갈등을 유발했다.

한편, 기동대원들이 컵누들을 먹는 모습이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크게 보도되었다. 평균 시청률 50%를 넘는 높은 주목도 덕분에 컵누들의 인지도는 단숨에 높아졌다. 방송 직후 다른 현경이나 보도진의 주문이 잇따랐고, 이것이 다시 크게 보도되면서 컵누들의 매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일약 히트 상품이 되었다[43][44]

; 모플사

2월 22일, 아사다 미쓰테루(릿쇼대 교수), 마루야마 테루오(승려), 미토 이와오(도쿄대 조교수), 기무라 소(변호사) 등이 자신들을 '구조 연락 센터・모플 주식회사'라고 소개하며, 농성범들과의 교섭을 명목으로 노나카 이쓰오 본부장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사사 아쓰유키는 "신변 안전은 스스로 책임질 것", "대화 시 통첩하지 말 것", "현장 경찰관의 지시에 따를 것"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서면으로 서약하면 설득을 허용하겠다고 답했다.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들은 당황하며 "그들이 우리에게도 총을 쏠까요?"라고 물었다. 사사가 "친부모에게 총을 쏘는 자들이니 당연히 쏠 것입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라고 말하자, 그들은 "도쿄 본부와 상의 후 답하겠다"며 물러났다.

이후 그들은 조건 없는 면회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을 비판하고, 가루이자와 정내에 머물며 "연합적군 총격전 단호 지지. 산악 경관 권총으로 사살 기도. 위협이 아니라 진짜다. 경시청에서 저격반 50명 소집"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는 등 선전 활동을 벌였다.

이 외에도 일본사회당 소속 전직 국회의원 다카쓰 마사미치는 3월 1일 히비야 야외 음악당 집회에서 "연합적군은 불과 5명으로 1,400명의 경찰대를 상대로 잘 싸웠다. 이제 사회주의 운동은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50년 동안 이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혁명도 머지않았다"고 연설하여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사건 당시에는 연합적군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일부 존재했다.

; 철구 작전

당시 TV 시청자들을 놀라게 한 철구 작전은, 사실 도쿄대학 안다 강당 사건 당시 경시청 경비 제1과장이었던 사사 아쓰유키가 제안했던 것이 아사마 산장에서 실행된 것이라고 사사 본인이 밝혔다. 사사는 전공투가 건물 상부에서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기동대원을 보호하고, 점거된 건물에 신속하고 안전하게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야스다 강당 정면 입구를 건물 해체용 몽켄(크레인 등에 매달린 무거운 철구[45])으로 파괴하는 정면 돌파 작전을 건의했으나, 당시 하타노 아키라 경시총감에게 거절당했다. 그 이유로는 야스다 강당이 국가 등록유형문화재[46]이며, 야스다 재벌 창시자 야스다 젠지로가 기증한 건물이라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크레인이 등장했을 때의 심정에 대해, 범인 중 한 명이었던 가토 린쿄는 "산장에 들어갔을 때부터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크레인의 등장은 정말 속수무책이라는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고 회고했다.

최근 TV 프로그램에서는 경찰에 중장비(철구 크레인)를 제공한 회사와 실제로 크레인을 조종한 민간 협력자가 실명으로 보도되고 있다. 과거에는 보복을 우려하여 당사자들이 이를 부정했지만, 경찰의 노력으로 연합적군과 그 동조 세력의 보복 활동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사실상 연합적군이 궤멸했기 때문에) 실명 공개가 가능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작전에 사용된 철구는 2018년 기준으로 나가노 시내의 주식회사 시라타구미에 보존되어 있다.

작전 당시 철구가 멈춘 이유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크레인 엔진에 물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이는 현장 경찰관의 즉석 변명이었고 실제로는 "좁은 조종실에 탑승한 특수차량대 대장이 배터리 터미널을 발로 차서 고장 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작전에 참여했던 토목 회사 관계자는 고장이 아니라 차량 자체의 한계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해당 크레인은 경찰 차량이 아닌 미군 폐품을 민간 회사가 사용하던 것이었고, 여기에 급하게 방탄 개조를 한 것이었다. 또한 몽켄 역시 전용 차량이 아닌 일반 크레인에 철구를 매달아 보강한 것이어서 거의 일회성 작전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34][35]

당시 경시청 제9기동대장이었던 오오쿠보 이세오는 철구 작전이 실패였다고 회고했으며, 사사 아쓰유키 역시 작전 중 크레인 고장으로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 생중계

1972년 2월 28일, 경찰의 강행 돌입 작전은 NHK와 민영 방송 5개사를 통해 범인 체포 순간까지 생중계되었다. 이 중 NHK, 닛테레, TBS, 후지TV의 중계 영상은 VTR로 남아있다. 특히 나가노방송과 후지TV는 당시 흑백용이었던 나가노방송의 중계차와 고감도 카메라를 이용해 범인 체포 장면을 성공적으로 포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보도에 크게 힘쓰지 않았던 후지TV는 보도 부문을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어두운 곳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흑백 카메라가 암시 카메라로서 재평가받는 등 이후 텔레비전 보도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 후방의 치안

당시 나가노현 경찰 정원 2,350명 중 838명(정원의 36%)이 아사마 산장 사건과 다른 연합적군 대원 수색 작전에 동원되었다. 사건이 장기화되면서 후방 치안 공백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절도 범죄 증가가 우려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건 기간 동안 범죄 발생 건수와 교통사고가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사건 중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TV 시청을 위해 외출을 삼가면서 자동차 통행량이 줄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 빈집털이 대상이 줄었으며, 심지어 범죄자들조차 TV 중계를 보느라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 경비 심리

'경비 심리학 연구회' 소속의 미야기 오토야 동공대 명예교수와 시마다 카즈오 성심여대 교수 등이 현지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경비 본부 간부들에게 "정보에 굶주린 대원들에게 정보를 자주 전달하라", "불빛이나 소리를 이용한 양동 작전으로 범인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라" 등의 조언을 했다.

한편, 다카하시 미키오 경찰청 차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연구회의 현장 시찰에 의욕이 넘쳤던 과학수사연구소의 한 기술관이 간부들 앞에서 TV 출연 준비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개한 마루야마 타카시 참사관이 토미타 아사히코 경비국장에게 항의 전화를 하는 일도 있었다.

;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의 영향

탤런트 하기모토 킨이치는 아사마 산장 사건 생중계를 보면서, 단지 산장의 창문만 비추는 영상이 일본 전국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고 텔레비전에서 중요한 것은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는 이후 그가 예정된 각본을 피하고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는 프로그램 제작 방식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48][49]

8. 사건을 다룬 작품


  • '''소설'''
  • * 엔지 ぶん코, 『식탁 없는 집』, 신초샤, 1979년.
  • * 오에 겐자부로, 『하마에게 물리다』, 분게이슌주, 1985년. 연합적군 사건을 모델로 한 사건에 관련된 인물이 주인공이다.
  • * 타츠마쓰 와헤이, 『빛의 비』, 신초샤, 1998년. 산악 베이스 사건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연합적군 사건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 '''만화'''
  • * 야마모토 나오키, 『레드』 / 『레드 마지막 60일 그리고 아사마산장으로』 / 『레드 최종장 아사마산장의 10일간』, 고단샤,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연재.

  • '''영화'''
  • * 식탁 없는 집: 1985년. 엔지 분코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 * 빛의 비: 2001년. 타테마츠 와헤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원작을 극중극으로 사용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 *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 2002년. 사사 준코의 저서 『연합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을 원작으로 한다. 경찰 당사자인 사사 준코, 우다가와 신이치, 고다 나르미가 카메오 출연하고 있다.
  • * 실록·연합적군 아사마 산장으로 가는 길: 2008년.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을 감상한 영화감독 와카마츠 코지가 연합적군 측의 시점에서 제작했다고 한다.

  • '''TV 프로그램'''
  • * 프로젝트 X ~도전자들~ 「아사마 산장 사건 충격의 철구 작전」: 2002년, NHK.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어 있으며, 전편은 돌입까지의 9일간, 후편은 돌입 당일의 1일을 추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경찰이나 연합적군이 아닌 현지 주민의 시각에서 사건을 다룬다. 해당 프로그램의 2001년 방송분 「마법의 라면・82억 식의 기적」(컵누들 탄생 비화)에서도 아사마 산장 사건 에피소드가 마지막에 소개되었다.
  • * 어나더 스토리즈 운명의 분기점 「아사마 산장 사건 10일간의 대치 진상」: 2021년, NHK. 1회 완결로 경찰, 보도진, 범인의 3가지 시점으로 진행된다. 돌입을 지휘한 기동대 대장, 현장에서 중계를 계속한 아나운서(일본텔레비전 및 NHK 아나운서 인터뷰 포함), 그리고 산장에 대치했던 범인 중 한 명(가토 린쿄)의 증언을 바탕으로 10일간의 사건을 다룬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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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행물 「連合赤軍(統一組)第一審判決」 判例時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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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논문 Film looks at '72 Asama ultralef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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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간행물 連合赤軍事件(統一組)第一審判決 判例時報社 1982-11-00
[34] 간행물 月刊アーマーモデリング 大日本絵画 200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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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웹사이트 あさま山荘事件:連合赤軍がたどり着いた悲惨な結末 https://www.nippon.c[...] 2022-05-05
[38] 간행물 特殊部隊の編成について 警察庁次長 1972-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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